한동대 성명에 대해 서울비님께서 지적하는 유치함이란?


아마도 이런 것인 것 같다.

"
정치와 이념을 논하려면, 제대로 된 정치적 배경을 갖고 논해라.
이제 좀 눈이 뜨여서 즉흥적으로 반응한 것 같은데,
그래봐야 같은 정치 바닥이고 너도 알게모르게 물든 이념이 바로 그런 것이거든.
"

그래서, 서울비님은 탈 정치적인가? 정치적이라고 보여진다면, 그냥 정치적인 반론을 하시면 된다.
내가 보기엔 성명의 본인은 정치적인 얘기나 이념에 대해서 제대로 운을 뗄 개념이 별로 없다
나로선 정말 순수한 신앙의 성명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탈정치도 아니고 유치하다고 그러구선 모든 비판과 반론들은 그것이 철저한 이념이라는 논거를 든다.
유치하다고 하는 글에서 이념을 발견하시는 것. 다분히 정치적이다.

자살. 무슨 사회 심리적 분석을 하신다. 그렇다. 그렇게 보면 유치한거 맞다.
하지만, 무엇이 더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그런 분석이 혹여 더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했음을 보여주기는 하는가?
성명 본인은 간단한 표현만으로 무슨 숭고한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총학'이라고 지칭한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의견 표명으로서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아주 상식적이라고 보여지는 표현들(물론 상식에도 오류가 있다)에 대해서 유치하다고 말한다면,
서울비님께서는 평소에 어떻게 대화하시는지 일단 궁금하고,
혹시 대표기도에 대해서도 이렇게 유치한 표현들은 유치하다고 평하시는지 묻고싶다.

또 다시한번 묻고 싶다.
"서울비님께서 갖고계신 신앙의 양심은 자살이 죄라고 하나요?"
문제의 핵심의 반정도는 이 대답의 질문이 갖고 있다.

즉 한동대의, 세상에서 보다 거룩하고 하나님과 친밀할 것이라 여겼던 학우들에게
그리고 대외적으로 한국교회에
구체적이고 명확한 특정한 죄에 대한 죄의식을 들추어내고 회개를 촉구했더니
이념적인 반응이 온거란 거다. 그게 혹시 예상치못했던 세상에서라면 괜찮다.
그게 아니라서 참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도 너무 놀랐을 것이다.
한동대가, 교회가,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달라졌나 싶을 것이다. 본인도 그렇다. orz

그래서 결국 우린 유치한 건가?

나는 설령 그게 유치하다고 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으며, 다시한번 한동대 성명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싶다.

ps;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사람 아닌가? 아니면 개혁교회를 떠나면 된다.
모든 논의에 앞서 진정성을 갖는 정체성을 먼저 요구하고 싶다.
마지막, 칼빈발언은 안티와 같은 류다.

by 낭망백수 | 2009/06/05 13:30 | gate | 트랙백(2) | 덧글(0)

[Book/신국론] 로마의 평화와 타락

[신국론 2권 18.2 中]
그 시대를 살루스티우스 본인이 어떻게 간추리고 묘사하는지 그의 「역사」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는 평화 시절에 발생한 나쁜 풍속이 얼마나 심하게 번졌으며 그것이 시민전쟁까지 도달했음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가 하는 말대로 
"그때부터 조상들의 습속은 전처럼 서서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여울처럼 급속하게 추락했다. 청년들이 향락과 물욕으로 하도 부패하여 스스로 재산을 소유할 능력도 없고 남들이 소유하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태어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by 낭망백수 | 2009/04/17 21:15 | 트랙백 | 덧글(0)

[Book/신국론] 교회의 가치

[신국론 2권 1-6 中]

 

... 탐욕을 절제하고 야심을 억누르며 사치를 피하라는 신들의 명령에 백성들이 경청하는 집회가 이루어지는 곳 말이다. 페르시우스가 크게 꾸짖는 대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우는 모임 말이다:

 

오, 가련한 자들이여, 부디 배워서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라!

우리가 무엇이며, 어떤 삶을 살고자 태어났는지를

어떠한 질서가 부여되었으며 어떤 목적지가 주어졌는지를

어디에 완만한 굽이가 있고 또 어디로부터 그것이 오는가를

은전의 한도가 어디며, 무엇이 바랄 만한지, 힘들여 번 돈은 무슨 소용인가,

조국이며 사랑스러운 이웃들에게는 얼마만큼이나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지를

신은 그대가 누가 되라고 명했으며, 그대는 인간사 어디에 자리해 있는가를!

 

도대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신들의 계명이 낭송되는 장소가 어딘지 말해보라. 그 신들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그 계명이 자주 들려오는가 말해보라. 그리스도교가 어디로 펴지든 우리는 이 목적으로 설립된 교회들을 어디서나 보여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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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할 다른 가치의 여지는 없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이던가?

by 낭망백수 | 2009/04/02 14:37 | gate | 트랙백 | 덧글(2)

[발췌] 잘 설계된 인터페이스

from. p.134 책 '경험디자인의 요소' (http://kangcom.com/common/bookinfo/bookinfo.asp?sku=200902100018)

인터페이스 디자인

성공적인 인터페이스들은 사용자들이 중요한 부분들을 즉각적으로 알아 차릴 수 있는 종류의 인터페이스들이다. 한편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지나갈 수도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복잡한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를 설계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사용자들이 다룰 필요가 없는 측면들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내고 그것들의 가시성을 줄여주는 것(도는 그것들을 아예 빼버리는 것)이다.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배경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사고는 약간의 조정을 필요로 할 수 있다. 이것은 때로는 그들이 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일일 수 있다. 좋은 프로그래머는 언제나 가장 개연성이 작은 시나리오들(이른바 프로그래밍 용어로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사례들)을 고려한다. 결국, 프로그래머에게 있어 궁극적인 성취란 결코 깨지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사례를 고려하지 않은 프로그래밍은 그러한 극단적인 환경에 처하게 될 경우 바로 문제가 생길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들은 모든 사례들을 그것이 한 명의 사용자를 대표하든 천명의 사용자를 대표하든 관계없이 동등하게 처리하도록 훈련받는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인터페이스 디자인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작은 수의 극단적 사례들에 대다수 사용자들의 요구만큼이나 동일한 비중을 두는 인터페이스는, 일부의 사용자들만을 즐겁게 해주는 잘 갖추어지지 못한 인터페이스로 끝나고 만다. 잘 설계된 인터페이스는 사용자들이 취할 가능성이 가장 큰 행동 과정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터페이스 요소들을 접근하고 사용하기에 가장 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이지에서 사용자들이 누를 가능성이 가장 큰 버튼을 가장 크게 만드는 것이 모든 해결책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사용자들이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을 더욱 쉽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기교들을 채택할 수 있다. 한 가지 간단한 기교는 인터페이스가 사용자에게 처음 제시될 때 이미 선택되어 있는 상태로 남겨져 있는 디폴트(default) 사항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용자의 태스크와 목표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용자 대부분이 간단한 것 보다는 상세한 검색결과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디폴트 선택사항 옆에 "상세사항 보기" 라는 체크박스(checkbox)를 둠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체크박스에 있는 라벨을 읽고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가 되든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즐거울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시스템이 바로 직전에 멈추었던 당시에 사용자가 선택했던 사항들을 자동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때로는 표면 단계에서 더 큰 기술적 노력들을 필요로 하며, 그 결과 어떤 개발팀들에게는 성공적으로 구현하기에는 비실제적인 사항이다.)

by 낭망백수 | 2009/02/19 01:05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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